[사람과뉴스 안근학 기자] 1995년 5월 10일, 대한민국 경기도 남부에 우뚝 선 도시, 평택시는 하나의 이름으로 새로운 역사를 시작했다. 구(舊) 평택시, 송탄시, 평택군, 세 지역이 수십 년간 이어온 행정적 분리를 끝내고 '도농복합형태의 통합 평택시'로 닻을 올린 지 올해로 정확히 30주년이 되는 해이다.
평택시민들의 목소리와 함께, 평택의 빛나는 발전사를 기록하고 미래를 응원하는 사람과뉴스 .
이 30년의 세월은 단순한 시간의 흐름이 아닌, 갈등과 진통을 넘어 "상생과 포용"을 향한 시민들의 위대한 선택과 헌신이 빚어낸 찬란한 성공 신화이다.
당시 인구 32만 명으로 출발했던 작은 소도시들의 연합체는, 이제 인구 65만 명을 눈앞에 두고 대한민국의 경제, 산업, 안보를 책임지는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는 명실상부한 국제적인 역동 도시로 변모했다.
이 특별 기고는 통합 30주년을 맞아, 평택이 걸어온 격동적인 역사와 눈부신 성과, 그리고 미래 100년으로 나아갈 희망의 비전을 조명하며 시민들의 자긍심을 고취시키고자 기획되었다.
제1부: 통합, 갈등을 넘어 상생의 역사적 선택 (1995년 이전의 평택)
평택의 역사는 지리적 특성만큼이나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본래 진위천과 안성천을 경계로 하여 북부 진위군, 남부 평택현(후에 평택군), 그리고 서부의 수원군 일부(현 서평택 일대)로 나뉘었던 이 지역은 1914년 일제에 의해 진위군을 중심으로 통합되었다.
이후 1938년 진위군이 평택군으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현재 평택이라는 지명의 기틀이 마련되었지만, 근대화와 도시화 과정에서 다시 분리와 통합의 과정을 겪게 된다.
1981년 7월 1일: 평택군 송탄면이 송탄시로 승격하여 평택군에서 분리되었다.
1986년 1월 1일: 평택군 평택읍이 평택시로 승격하여 평택군에서 또다시 분리되었다.
이로써 평택 지역은 평택군(농촌), 송탄시(상업/공업), 평택시(행정/교통) 세 개의 독립된 행정구역으로 나뉘어 발전하게 되었다. 행정의 비효율성과 지역 간 불균형 발전의 우려가 높아지던 시기, 1994년 정부의 '도농통합' 정책은 이 세 조각을 다시 하나로 묶는 역사적 기회가 되었다.
통합 논의 초기, 행정 구역 통합을 둘러싼 의견은 팽팽하게 맞섰다. 특히 재정적, 행정적 이익을 둘러싼 갈등과 기득권 상실에 대한 우려는 피할 수 없는 진통이었다. 그러나, 지역의 장기적인 발전과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대의명분이 시민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1995년 3월, 마침내 정부 주도로 통합 결정이 내려지고, 송탄시, 평택시, 평택군은 그해 5월 10일, 하나의 "통합 평택시"로 새롭게 출발했다. 이 결단은 단순한 행정구역의 통합을 넘어, 한때 작은 소도시들로 머물렀던 세 지역의 강점을 모아 더 큰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자 했던 시민 모두의 지혜와 용기였다.
제2부: '함께한 시간의 힘', 대한민국 중추 도시로 도약 (1995년 ~ 현재)
통합 이후 30년간 평택은 행정적 안정과 더불어 대규모 국책 사업을 성공적으로 유치하며 압축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이 성장의 동력은 바로 평택 시민들이 함께 걸어온 "함께한 시간의 기억"에서 비롯된다.
1. 평택의 기적, 첨단 산업과 경제의 심장으로!
평택 통합의 가장 빛나는 결실은 바로 세계적인 첨단 산업도시로의 변모이다.
'평택지원특별법'과 대규모 투자: 2004년, 미군 기지 이전에 따른 지역 발전 지원을 위해 제정된 '평택지원특별법'은 평택 발전의 결정적인 마중물이 되었다. 이 법을 기반으로 고덕국제신도시 조성과 함께 삼성전자 반도체 평택 캠퍼스 유치 및 대규모 투자가 이어지며 평택은 명실상부한 "K-반도체의 전초기지"로 자리매김했다.
교통 및 문화 인프라 확충: 평택항 개발, KTX/SRT 지제역 개통, 광역 교통망 확충 등 핵심 인프라 사업이 동시에 진행되면서 평택은 수도권 남부와 충청권을 잇는 교통·물류의 거점으로 성장했다.
2. 도시와 농촌, 균형 발전의 모범:
통합 평택시는 도시와 농촌이 조화롭게 발전하는 도농복합시의 이상적인 모델을 제시한다.
'슈퍼오닝' 브랜드의 성공: 진위천과 안성천 유역의 비옥한 평야에서 생산되는 '슈퍼오닝' 브랜드는 그 품질을 인정받아 해외 시장에서도 가치를 인정받는 등 농업의 경쟁력을 끌어올렸다.
이는 도시의 발전 속에서도 농촌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평택시의 노력이 빚어낸 결과이다.
서평택의 발전 동력: 과거 서해안의 간척지였던 서평택 지역은 "아산만 방조제 건설(1974년 평택지구 다목적농업개발사업)"을 통해 비옥한 농경지를 확보하고, 이후 평택항 및 산업단지 조성의 기반을 마련하며 지역 경제 성장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3. '기지촌 문화'를 넘어 '국제화 도시'로:
오랜 시간 미군 기지(오산 K-55, 캠프 험프리스 K-6) 주둔의 특수성으로 인해 형성된 '기지촌 문화'는 평택의 또 다른 역사였다. 그러나 시는 갈등을 극복하고 상생하는 길을 모색했다.
국제 교류와 화합의 장: 송탄과 안정리 일대는 미군 부대 소비 특수를 누리며 상업도시로 성장하는 한편, 한국전쟁 이후부터 꾸준히 한국인과 외국인이 교류하는 독특한 환경을 형성했다. 오늘날 안정리 예술인 광장 등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한국과 미국 문화가 공존하고 교류하는 국제적인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4. 시민 정신, 성장의 뿌리:
평택의 성장은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공동체 의식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새마을 운동의 모범: 1970~80년대 새마을운동이 국가적으로 추진될 때, 평택은 마을 환경 개선과 소득 증대를 목표로 한 송탄읍 진위1리(예 평택군 진위면 갈곶리), 평성읍 두리(예 평택군 평성읍 두리) 등 우수한 새마을 운동 사례를 배출했다. 특히 1948년 송탄읍 진위1리에서 결성된 '원솔소년단'은 공공기금 마련, 산림 조성 등 자발적인 마을 환경 개선 활동을 펼쳐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새마을기를 수여받는 등, 평택시민들의 협동 정신과 자발성은 통합 이후에도 지역 발전의 핵심 동력이 되었다.
제3부: 미래 100년을 향한 '더 큰 평택'의 비전
통합 30주년을 맞은 평택은 괄목할 만한 현재를 기록하고 있다. 인구는 65만 명을 기록하며, 시의 열정과 활력을 반영하듯 전국 최고 수준의 출산율과 혼인율을 기록하는 젊은 도시이다.
평택시는 이제 100만 대도시를 향해 담대하게 도약하고 있다.
미래 산업의 중심: 대한민국 미래를 이끌 첨단산업 특화도시로서의 위상을 더욱 공고히 할 것이다. 반도체뿐만 아니라 수소 산업 등 미래 먹거리 확보를 통해 지속 가능한 경제 성장을 추진하고,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하며 젊은 세대가 모여드는 활력 넘치는 도시를 만들어갈 것이다.
균형 잡힌 국제 도시: 시민의 역량을 결집하여 안보, 산업, 경제, 행정,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균형 있게 성장하는 자족도시를 목표로 한다.
서해안 물류의 중심인 평택항과 고덕 신도시를 중심으로 한국을 넘어 세계를 무대로 하는 국제화 도시로 나아갈 것이다. 통합이라는 역사적 선택을 통해 평택시민들은 갈등을 포용하고, 분열의 시기를 넘어 화합의 결실을 맺었다. 이는 단순히 행정 구역을 합친 것을 넘어, "더 큰 평택"을 꿈꾸는 시민들의 열망과 노력이 빚어낸 위대한 성과이다.
평택이 걸어온 "함께한 시간의 기억"은 앞으로도 풍요롭고 행복한 미래를 여는 강력한 원동력이 될 것이다.
평택 시민 모두가 '하나로 통하여 합하여 나아가자'는 통합의 정신을 되새기며, 미래 100년을 이끌 자랑스러운 도시를 함께 만들어 나갈 것을 본 언론사 사람과뉴스 도 시민과 함께 다짐 합니다.
평택 통합 30주년, 시민 모두에게 무한한 자긍심과 감사를 전합니다! 사람과뉴스 제작진 일동(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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